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문단 편집) ===== 율리오 2세와의 관계 ===== 반면 성격 역시 개차반까지는 아니어도 꼬장꼬장해서 교황에게까지 대든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오만했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리는 걸로 유명했다. 당시 [[교황]]이 지금처럼 실권이 없는 때도 아니었고, 오히려 후대의 평가로는 아마 '교황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때'라고 한다. 게다가 미켈란젤로가 대든 교황은 여러 번 군사 원정도 나가고 당할 자 없다던 영웅 [[체사레 보르자]]를 한순간에 몰락시켜 버린 [[권모술수]]의 대가인데다가, '''황제''' 및 '''전쟁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더러운 성격으로는 유럽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만큼 유명했던 [[율리오 2세]]였다. 어느 누구나 미켈란젤로가 조각가이지 화가는 아니란걸 알고 있었음에도[*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가 한번도 그려본적 없는 그림을 그려도 엄청난 걸작을 만들 불세출의 천재라고 인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론적으로 옳은 생각이긴 했지만.]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를 기어코 억지로 끌고와서 그림을 그리게 만들고, 그것도 드럽게 그리기 어려운 프레스코화를 드럽게 넓고 높은 성당 천장에 그리게 시킨 것에서 [[율리오 2세]]의 성깔과 막강한 권력을 체감할 수 있을 지경. 미켈란젤로만큼이나 꼬장꼬장한 성격의 [[율리오 2세]]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두고 미켈란젤로와 마찰을 빚곤 했다. 그 사례 중 하나로 언제 그림이 완성되냐고 교황이 따진 적이 있었는대, 미켈란젤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제가 끝낼 수 있을 때, 그림이 끝나겠지요"'''라고 이죽거렸다. 그 이죽거림에 화가 난 교황이 말 조심하라며 미켈란젤로를 지팡이로 한 대 세게 때리고 만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기분이 상해 짐 싸들고 [[로마]]에서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버렸다.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교황이었지만 당시 [[이탈리아]]에 그만한 실력자가 없었기에, 피렌체 대사를 보냈는데 피렌체 대사는 현재 한화로 약 5억원 정도 되는 밀린 임금을 지불하며 사정사정을 한 끝에 간신히 미켈란젤로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해 두 사람은 화해했고 [[시스티나 성당#s-5.1|시스티나 천장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당시 대사가 미켈란젤로를 돌려보내며 교황에게 쓴 편지에는 '''"성하, 한 번만 그를 용서하시고 일을 맡겨 주소서. 이 피렌체의 천재는 세상이 놀랄 작품을 남길 것이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아니꼬왔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어지간히 컸는지 [[율리오 2세]]는 이후에도 미켈란젤로와 여러 다툼을 벌였다. 하루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너무나 보고 싶었던 것인지, 당장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면 미켈란젤로를 비계[* 飛階, scaffolding.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설치한 사다리 같은 지지대. 한국 업계 용어에서는 주로 '아시바'로 칭함.]에서 밀어버리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었다.[* 앞의 각주에서도 설명했지만 발 삐끗하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환경이니 그야말로 죽여버린다는 협박이다. 율리오 2세의 성질머리도 정말 장난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미켈란젤로는 자기 작품을 중간에 보여줄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이 작품의 작업 과정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다만, [[라파엘로]]는 용케 몰래 훔쳐보면서 그의 스타일을 순식간에 흡수했다.] 기어코 [[율리오 2세]]는 작업중인 성화를 미리 구경하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성급함이 자신의 작품을 망쳤다고 한탄했다. 그는 교황의 작업 방해(?) 때문에 작품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골때리게도 [[율리오 2세]]는 1511년 8월 11일에 그림을 미리 봤다고 자랑하는 선언을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해 10월에 마침내 이 대작이 완성되었다. 율리오 2세는 자기가 주문한 이 대작을 고작 4개월밖에 못 보고 선종했다. 교황이 피운 난리가 어지간히 지긋지긋했는지, 미켈란젤로는 작품에 약간의 뒤끝을 남겨두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보면 [[율리오 2세]]의 얼굴을 모델로 그려진 [[예언자]] [[즈카르야]] 뒤에 아기 천사가 검지 손가락을 말고 있는 이스터에그가 있다. 이것은 당대 이탈리아의 손가락 욕, 즉 [[뻐큐]]였다고 한다. 뒤의 [[최후의 심판#s-2|최후의 심판]]에서의 일화도 그렇고, 레아의 일화도 그렇고 그는 의뢰인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만드는 당시의 풍토를 따르는 한편 몰래몰래 예술 작품에 자신의 노골적인 심경을 자주 담아내었다.[* 사실 이건 미술, 특히 종교 미술의 오랜 전통이다. 비슷한 것으로, 죄인을 심판하는 장소를 지키는 있는 천사 앞에 자신이 건축한 성당의 미니어처를 보여주며 선처를 사정하는 건축가 본인이 성화에 슬쩍 들어간 경우나, 하기아 소피아에 결혼 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황제의 일화가 반영된 성화가 그려진 경우 등, 사족을 달은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원래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지시한 그림은 [[12사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12사도 성화를 그리기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이 너무나 거대하다고 판단하여, 정작 고용주는 시키지도 않은 대규모 그림으로 작업을 확대하기로 결심한다. 성당의 규모에 걸맞게 '''[[천지창조]]에서 [[노아의 방주]], [[모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성경]]의 이야기를''' 시스티나 천장에 그리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작업 규모가 당초 예상보다 배는 더 커졌고, [[율리오 2세]]는 이 무모한 발상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주제의 전환을 허락해 줬다. [[율리오 2세]]가 아주 근거도 없이 [[뜬금포]]로 미켈란젤로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한 건 아니었다. 물론 그 근거란게 참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이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피렌체 시청인 베키오 궁전을 장식할 벽화 대결을 벌인 적이 있었고, [[율리오 2세]]는 이런 실험적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핑계로 "천재니까 그림도 아무튼 잘 그리겠지 뭐" 식으로 의뢰를 한 것이다. 다 빈치와의 그림 대결을 하며 만들어졌던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앙기아리의 싸움"이란 주제로 그리다가 프레스코화의 마지막 건조에서 실수를 하는 바람에 물감들이 전부 녹아내리고 말았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의 전투"를 그렸는데,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망친 이후 미켈란젤로 본인도 다른 초청을 받아 떠나면서 결국 대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미켈란젤로가 양피지 위에 그 습작을 그린 것은 남아 있다. 그 습작으로 미루어 보아 미켈란젤로의 회화 실력은 시스티나 천장화 이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즉, 아주 백지부터 시작해 그런 대작을 그려낸 것은 아니다. 물론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의뢰를 날린 [[율리오 2세]]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같은 프레스코화라 해도 벽화와 천장화는 수준이 다른 이야기인데도 미켈란젤로가 횟김에 그린 미완성인 벽화 하나를 두고, 어쨌든 프레스코화 의뢰를 받은 적이 있으니 천장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거의 막무가내로 맡긴 [[율리오 2세]]의 예술에 대한 몰이해도 돋보인다. 시스티나 천장화 이전에 회화 그리는 법을 알았다고 해도, 작업을 시작했을 때에는 한 구획 그리는 데에 3개월이 걸렸던[* 이것도 말도 안 되게, 무지막지하게 빠른 작업 속도다. 보통 화가들은 미켈란젤로가 한 구획으로 잡은 공간을 천장화가 아닌 벽화로 그리는 데에 1년에서 3년을 잡았다. 물론 미켈란젤로만 못한 퀄리티로.] 미켈란젤로가 4년 후 작업 막바지에는 불과 40일이 걸렸다는 걸 보면, 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필적하는 불세출의 천재였음은 확실하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회반죽 위에 스케치도 안 하고 그저 양피지 위에 연습만 몇 번 한 뒤 천장에 올라가서는 [[일필휘지|슥슥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pep-web.org/document.php?id=psc.32.05050.fig_3.jpg|height=3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3.bp.blogspot.com/michelangelo+moses.jpg|height=3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Dying_slave_Louvre_MR_1590.jpg|height=3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MichelangeloPrigioni2ParisLouvre.jpg|height=300]]}}}|| || 율리오 2세 영묘 설계안 스케치 || 모세, 1513~1515년, 대리석, 2.35m, || 죽어가는 노예 || 반항하는 노예 || || 1505년 초안(이후 3차례 설계 수정) ||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2> 1513~1516년, 2.5m, 대리석,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 [[율리오 2세]]는 죽은 뒤에도 미켈란젤로에게 족쇄를 남겨 주었다. 당시 신축 중이던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에다가 본인의 무덤을 피라미드 형태로 짓고 미켈란젤로에게 이걸 장식할 조각 40개를 완성하라 명령했던 것. 이 계약은 미켈란젤로에게 평생 부담으로 남았지만, 시스티나 천장화와 달리 이 의뢰는 미켈란젤로가 혼쾌히 수락했다. 조각 1개에 3년 남짓 걸리는 걸 생각해 보면 40개면 120년이니 훌륭한 노예 계약이지만 그걸 지적한 지인에게 그는 '''"원형 탁자에 대리석 6개 올려 놓고 돌아가며 조각하면 1년이면 돼. 뭐 한 7년 하면 다 완성하겠지."'''라고 대답했다 한다. 하지만 (의뢰한 양반이 양반이다보니) 나중에는 의욕이 떨어져버렸고, 이 무식한 규모의 의뢰는 미켈란젤로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율리오 2세]] 사후에도 유족들이 꼬박꼬박 보수를 지급했기 때문에 배째라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다행히 미켈란젤로에게 다른 작업을 맡기고 싶었던 후임 교황이 율리오 2세의 유족과 협상해서 원래의 계획보다 크게 축소시키는 걸로 타협점을 찾은 덕분에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평생 하고 싶은 조각들을 하며 살게 된다. 시스티나 천장화로 괴롭힌 것에 대한 악감정만 아니었어도 미켈란젤로는 진짜로 이 무모한 규모의 의뢰를 완수하고도 남을 기인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율리오 2세]]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어거지로 의뢰한 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영묘를 미켈란젤로의 걸작으로 둘 수 없게된 것이다. 계약이 바뀌기 전에 완성해둔 조각상이 넷 있는데 하나는 바로 걸작 [[https://www.google.co.jp/maps/uv?pb=!1s0x132f61b11e29324f%3A0xd430b70f184c4aef!3m1!7e115!4shttps%3A%2F%2Flh5.googleusercontent.com%2Fp%2FAF1QipP0XfJpn9-KX3uxOXyLEq7x8SuPFXs6URX2RkEe%3Dw159-h160-k-no!5z66qo7IS4IOyhsOqwgeyDgSAtIEdvb2dsZSDqsoDsg4k!15sCgIgAQ&imagekey=!1e10!2sAF1QipP0XfJpn9-KX3uxOXyLEq7x8SuPFXs6URX2RkEe&hl=ko&sa=X&ved=2ahUKEwifnYv9t6DtAhUPIIgKHQQUCQMQoiowGnoECBMQAw|모세 상]]으로,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다. 모세 상이 완성되었을 때 감격한 미켈란젤로가 망치로 조각의 무릎을 치면서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해|왜 말을]] [[피그말리온|못 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며, 유월절마다 유대인들이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을 찾아 모세 상에 경배를 올리기도 했다. 나머지 둘인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 상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마지막 하나 '승리의 정신' 상은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 있다.[* 단, 승리의 정신 상은 율리오 2세 무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그 외에도 4개의 미완성 노예 상이 남아있다.[[http://blog.daum.net/misulmun49/15962002|#]] 성 [[예로니모]]의 오역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모세 상의 머리에 작은 뿔 2개가 솟아 있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스티나 경당의 비밀>의 저자인 벤저민 블레흐와 로이 돌리너는 다른 견해를 제기했다. 원래 이 조각상은 피라미드 모양의 영묘 윗부분에 설치될 예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를 받은 후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표현을 보다 현실감 있게 재현하기 위해, 모세의 얼굴을 무두질한 가죽으로 윤이 나도록 문질렀고 아래쪽에서 바라봤을 때는 시야의 제한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에 작은 뿔 2개를 조각해 대성당의 지붕에서 쏟아지는 빛이 모세의 머리에 반사되어 성서에 적힌 것처럼 빛나도록 한 무대적 효과를 노렸다고. 하지만 원래의 계약보다 대폭 축소되어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훨씬 작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설치하게 되자 미켈란젤로는 처음 의도했던 빛의 반사를 위해 자신이 아꼈던 모세 상에 수정을 가해서 '''모세의 얼굴을 왼쪽으로 90도 가까이 돌려놓고''' 성당 벽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이 모세의 얼굴과 뿔에 반사되도록 했다. 유감스러운 것은 나중에 성당 측에서 그 구멍을 폐쇄하는 바람에 지금은 그가 연출했던 환상적인 효과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율리오 2세]]와는 지겹도록 싸웠는데, 사실 이는 율리오 2세가 걸핏하면 무리한 요구를 하며 미켈란젤로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지지않고 사사건건 대들었다. 이토록 치고박고 싸워대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니 둘은 서로 증오하는 사이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나쁜 사이만은 아니었다. [[율리오 2세]]는 전쟁 시에는 자신의 적으로 돌아서기까지 한 이 예술가를 용서해 주고 당시 예술가의 지위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건방진 일을 해도 다 [[용서]]해주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자신을 착취하고 항상 힘든 요구만 하는 교황을 만나러 갔더니 바쁘다며 안 만나주길래 삐져서 가출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